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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2014년10월

[2014년 10월] 쑨얏센 기념관-센트럴

by 민다르크 2014.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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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얏센 기념관] 소호에서 도보로 5분

홍콩에는 쑨얏센 기념관이 두군데 있다.

센트럴역에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통해서 쑨얏센 기념관을 찾아가 보았다.

 

 

 

 

 

 

 

 

 

 

 

중국혁명의 지도자 쑨원 (1866-1925)

: 1914.7 일본에서 비밀정치결사조직인 '중화혁명당' 결성하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이다. 그 거대한 나라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거의 외국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청의 지배 계층의 부패와 무능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국민들 역시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아편 문제로 영국과 전쟁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아편은 국민들을 좀먹고 있었다.

게다가 1895년에는 일본에게 마저 졌다. 이 전쟁으로 청은 일본에 타이완과 펑후 열도를 할양하고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이제 중국은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청난 위기감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에 따른 각성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황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혹은 뒤엎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모색을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에서 태어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쑨원(孫文)이었다. 그는 1866년 11월 12일 광둥 성에 있는 췌이헝이라는 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은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부터 불과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문명의 접경 지역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한 숙명 때문일까. 그가 받은 교육 역시 그러했다.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 교육을 받은 후, 형 쑨메이에게 가서 호놀룰루에 있는 기숙학교인 이올라니 대학에 다녔고 거기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1882년 졸업해 고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타파한다고 마을의 수호신인 목상(木像)을 절단하는 사건을 일으켜 마을에서 쫓겨났다.

쑨원은 1884년 봄에는 홍콩에 있는 퀸즈 칼리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서양인이 운영하는 의과 대학을 다녔고, 1892년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집안에서 약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열여덟 살 때 잠깐 고향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성장기를 홍콩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며 보낸 것이다.

17살, 33살 때의 사진. 1915년 10월 15일 결혼 사진(왼쪽부터)

1893년 그는 의학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청 황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외국의 침략에 분노를 느낀 그는 개혁적 인물인 리홍장에게 중국의 개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써서 보냈다. 그러나 리홍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물여덟의 쑨원은 하와이로 갔고 거기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청 황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흥중회를 비밀 결사조직으로 다시 결성했다. 그러나 광둥에서의 봉기 계획은 발각되었고 동지들이 처형되었다. 수배 인물이 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계획했던 봉기의 실패와 동지들의 죽음은 쑨원을 더욱 단련시켰다. 그는혁명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기 시작했다. 그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서양식 옷을 입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청의 첩자에게 잡혀 중국으로 이송될 뻔하기도 했으나 옛 스승 제임스 캔틀의 도움으로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그는 이 사건의 전말을 기술한 <런던 조난기>를 써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런던에서 그는 대영 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다.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 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세력을 키우다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나카야마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세력을 결집했다. 1905년 화교들의 지원을 얻기 위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쑨원은 혁명에 뜻을 품은 망명가들과 연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해 지도자로 뽑혔다. 동맹회의 목표는 청을 전복시키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건설하고 외국 열강을 추방하며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쑨원의 사상은 민족, 민주, 민생주의라는 삼민주의로 구체화되었고, 후에 그것은 동맹회의 사상적 바탕이 됐다. 그러나 도쿄의 쑨원 추종 세력이 크게 불어나자 청은 일본 당국에 압력을 가해 쑨원을 추방하게 했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은 청에 저항하기 위한 단체들을 조직했고,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이들 쑨원 지지자들은 중국 남부에서 번번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1911년 10월 우한에서 시작된 혁명파들의 봉기는 양쯔 강 유역 전체로 번져갔다. 그리고 단 한 달만에 거의 모든 성이 호응을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공화제를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 내줬으나 약속 이행은 오래가지 않아

쑨원이 귀국했다. 1911년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은 그를 떠들썩하게 환영했다. 12월 29일, 14개 성에서 온 대의원들이 난징에서 그를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일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공포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쑨원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 후,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면 자신의 대총통 자리를 이양해 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쑨원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전쟁이나 내란은 외국 열강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권력보다는 중국 인민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위안스카이(왼쪽), 위안스카이에 의해 퇴위 당한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오른쪽)

쑨원의 제안이 있은 뒤 위안스카이는 황실에 압력을 가했고, 2월 12일 황제 푸위가 퇴위했다. 여섯 살 난 푸이에게는 황제 칭호의 유지와 엄청난 양의 연금이 약속되었다. 황제의 직계 가족들도 특별한 대우를 약속 받았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몇 달 뒤, 쑨원은 전국철로전권이라는 직위를 맡았다. 그는 철도 운송이 중국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전국을 돌며 일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1912년 중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그 해 여름 옛 동맹회의 일원이었던 쑹자오런이 국민당을 조직했고, 1913년 2월 선거에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의 싸움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끝이 났다. 3월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쑨원은 다시 정치로 돌아와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 나갔다. 1913년 11월,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쑨원에게는 이러한 불법적 조치에 대항할 현실적 수단이 없었다. 그 해 9월, 쑨원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황제를 꿈꾸다 스스로 몰락한 위안스카이

이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1914년 7월 8일, 쑨원은 살아남은 동지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새로운 조직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조직의 강령뿐 아니라 쑨원의 명령에도 따를 것을 서약해야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힘이 아니라 자신의 오산으로 몰락했다. 점차 독재 권력을 굳혀간 위안스카이는 이제 새로운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1914년, 그는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고, 그를 따르던 장군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다. 1916년 3월에 그가 황제가 될 계획이 없다고 재차 발표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좌절감을 견디지 못한 그는 몇 달 뒤 병사했다.

이제 중국에는 전국을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었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항상 혼란을 낳는다. 그때도 그러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10년간 중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힘으로 해결되는 시기가 왔다. 10여 개의 군벌이 서로 물고 물리는 세력 다툼을 하는 군벌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군벌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소유한 지방 세력으로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중앙 정부는 광대한 중국 전역에 군대를 파견해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정부의 재정이 궁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기르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외국 세력과의 결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들끼리도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동지가 되기도 했다.

국민당 정부 수립, 소련의 도움으로 정치적 근거 마련

위안스카이가 죽자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광둥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다. 그곳에서 그는 남부의 다섯 군벌과 연합해 진정한 중화민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어색한 동맹 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베이징에 있던 중국의 이름뿐인 중앙 정부는 북부 지방의 군벌 연합이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 유일의 합법 정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지만 열강은 계속 베이징의 지도자들만을 상대했다.

1922년 6월, 쑨원은 군벌에 의해 광저우에서 쫓겨났다. 중국 남부에서 벌어진 군벌 정치의 혼란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혁명 후의 러시아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끌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마르크스 레닌 사상이 중국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소련은 중국을 후원하고 나섰다. 그들은 상하이에 있던 쑨원의 국민당에도 접근했다. 서구의 지원이나 경제적 원조를 얻는데 거듭 실패한 쑨원은 소련의 원조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4년 광저우에 군사학교를 세울 당시의 쑨원 (오른쪽)

1923년에 그들은 협상을 통해 상호우호협력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에서 쑨원은 국민당의 광둥 복귀와 군벌과 싸울 군대의 양성을 돕겠다는 소련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당 입당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반제국주의와 당의 지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민주의가 다시 주장되었다.소련의 도움으로 쑨원은 광둥에 미약하나마 정치적 근거를 다시 마련하게 되었고,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소련의 도움을 얻어 1924년 국민당은 광저우 인근에 자체 군사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 군관 학교의 교장은 모스크바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돌아온 37살 장제스가 맡았다. 국민당의 기구는 공산당과 소련인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재정비되어 갔다.

이제 쑨원은 강한 군대와 정당과 동맹국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건강이 그를 가로막았다. 같은 해 북부에서 권력을 장악한 어느 군벌이 동맹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했다. 쑨원은 초청을 받아들였고, 12월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협상은 시작되지도 못했다. 그를 초대한 자가 협상을 결렬시킨 것이다. 쑨원이 당한 마지막 배신이었다. 그는 간암으로 입원해, 이듬해 1925년 3월 12일, 60살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중국을 구하라”였다고 한다.